한국농구의 전설 서장훈 (39)이 마지막 프로농구 경기를 치렀다.
부산 KT 소속인 서장훈은 19일, 전주 KCC를 상대로 한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시즌최다인 33점을 맹폭하며 팀의 84대79 승리를 이끌었다. KT가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함에 따라 서장훈으로서는 이날 생애 마지막 프로농구 경기를 치른 것이다.
서장훈은 이날 사직구장을 찾은 홈팬들 앞에서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는 “너무나도 부족한 저에게 20년 넘게 과분한 성원을 보내주셔서 감사하다. 제가 갖고 있는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지만 충족시키지 못해 죄송하다"고 지나온 농구시절을 회상했다.
서장훈은 이어 “부모님의 희생과 사랑이 없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라면서 가족과 구단 관계자들, 동료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골리앗,” “국보센터” 등으로 불렸던 서장훈은 별명에 걸맞게 대학시절부터 압도적인 기량을 자랑했다.
그가 소속된 연세대는 1994년, 대학팀으로는 사상 최초로 농구대잔치 우승을 거머쥐었다. 연세대는 이때 실업팀 최강의 위치에 군림하던 기아자동차의 대회 6연패를 저지했다.
서장훈이 이끄는 연세대는 이후 44연승, 농구대잔치 전승 우승 등을 달성하며 승승장구했다.
서장훈의 뛰어난 활약은 프로무대에서도 계속되었다. 신인시절 리바운드왕을 차지한 서장훈은 네 시즌동안이나 평균 20점 10리바운드 이상을 기록했고, 데뷔 이후 7시즌 연속 20점 이상을 기록했다.
외국인선수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KBL에서 한번이라도 리바운드왕을 차지하거나 시즌 평균 20점 10리바운드 이상을 기록한 국내선수는 지금까지도 서장훈이 유일하다.
서장훈은 1999-00시즌과 2005-06시즌 두 차례에 걸쳐 MVP와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서장훈은 기술과 파워, 신장을 겸비한 선수로 위력을 떨쳤다. 그는 207cm에 달하는 신장으로 하승진 (KCC, 221cm)가 등장하기 전까지 국내최장신 선수였지만 단순히 키만 큰 선수가 아니었다.
대학시절에는 달릴 수 있는 기동력과 준수한 점프력을 보유했으며 전성기 시절에는 외국인 센터와 매치업할 수 있을 정도의 파워도 자랑했다.
또한 그는 빅맨과 어울리지 않은 정확한 슈팅력도 자랑했는데, 2007년에는 3점슛 콘테스트에 출전해 단테 존스에 이어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뛰어난 기량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많은 안티팬들을 보유했다. 서장훈은 강한 승부욕으로 인해 심판에 대한 항의가 잦았는데, 이는 그에게 “건방지고 매너가 나쁜 선수”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또한 커리어 후반 서장훈은 부상과 많은 나이로 기동력이 떨어지면서 몸싸움을 줄이고 외곽슛을 던지는 비중이 늘었는데 이를 좋지 않게 보지 않는 이들은 그를 ‘슈팅센터’라고 부르며 비난했다. 갈수록 떨어지는 수비력 역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장훈이 한국농구에 미친 영향력은 지대하다. 그는 진정으로 코트를 지배했던 최초의 한국빅맨이었으며 그가 남긴 통산 1만3,231점, 5,235 리바운드는 근접하는 이가 없을 정도이다.
통산득점 2위인 추승균은 1만 19점에 불과하며 이미 은퇴했다. 또한 5,000리바운드는커녕 4,000리바운드를 넘긴 선수도 전무하다.
KBL에서의 기록 외에 서장훈은 국제무대에서도 한번도 국가의 부름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국가대표팀에서 13년간 뛰며 2002 아시아 게임에서 대한민국에 20년만의 금메달을 선사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국제무대에서 압도적인 신장과 기량을 자랑하는 NBA스타였던 중국의 야오밍 (226cm)을 온몸을 던져 막기도 했다.
서장훈이 은퇴함에 따라 그의 후계자는 누가 될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하승진, 오세근 (안양 KGC) 등 여러 후보가 있지만 이들이 서장훈을 따라 전설이 되기 위해서는 그의 철저한 자기관리와 승부근성 역시 배워야 할 것이다. (코리아헤럴드)
<관련 영문 기사>
Basketball legend Seo Jang-hoon retires
By Yoon Min-sik
Korean Basketball legend Seo Jang-hoon played his last game in the Korean Basketball League on Tuesday, leading his Busan KT to an 84-79 victory over Jeonju KCC in Busan.
The 39-year-old veteran -- whose dominance on the court is well expressed by his nickname “Goliath” -- capped off his career with somewhat of a bang by scoring a season-high 33 points. It was a consolation prize to Busan fans disappointed by the team’s lackluster season.
After the game, the center bid farewell to the fans that filled Sajik Stadium.
“Thank you so much for giving me overwhelming support for over 20 years. I have always tried my best, but I’m sorry that I’ve failed to fulfill your expectations,” a tearful Seo said.
“I would not be here if it weren’t for my parents’ love and sacrifice. I’d like to thank my family, the organization of KT, and my teammates. It has been an honor to play with them.”
Seo Jang-hoon had been an unstoppable force since the mid-1990s, when he took the court against the best players in the country.
As a freshman at Yonsei University, he led his team past other college teams and semi-pro teams to win Korea’s biggest ProAm tournament, Nonggu Dae Janchi (Grand Basketball Festival) in 1994.
As Korea did not have a true professional basketball league at the time, Nonggu Dae Janchi was the most prestigious basketball competition in the country. By winning the tournament, the then-20-year-old center became a household name.
Seo’s team had no equal. In the 1996-97 season, Yonsei University won 44 consecutive victories, and in 1997, the team swept every single opponent in the Nonggu Dae Janchi.
Goliath carried on into the pro league. While the KBL is a league dominated by foreign players, Seo always held his ground and overpowered his matchups.
He led the league in rebounds in his rookie season, and averaged more than 20 points and 10 rebounds per game for four seasons. No other Korean has ever recorded 20-10 for a season for won a rebounding title.
Seo won MVP twice and led his team to a championship as many times as well.
He was the first Korean center who combined size, strength and skills. At 207 centimeters, he was among the tallest players in Korea, but he could run and jump as well.
He was not just a brute force, either. In 2007, he became the tallest player ever to participate in the three-point shootout at the KBL all-star weekend. He lost by a point to Dontae Jones in the finals.
In spite of his basketball skills, Seo was never a fan favorite. Many fans criticized Seo for complaining to the referees too much, and Seo’s intimidating game face did not appeal either.
In the latter part of his career after his athletic abilities were severely compromised by injuries and age, people started bashing him for taking too many three-point shots and being a poor defender.
Despite the criticism, Seo’s contribution to Korean basketball is irreplaceable. He was the first Korean big man to truly dominate the league and his legacy remains largely unchallenged.
He is the record holder for the most points and rebounds in KBL history with 13,231 points and 5,235 rebounds.
The runners-up in the respective categories, Choo Seung-gyeun and Johnny McDowell, have long left the league.
When his country called on him, Seo never backed down: He played on the national squad for 13 years.
The 2002 Asian Games were a moment to remember for him. Seo battled supremely talented Yao Ming of China and helped his team win the first Asian Games gold medal in 20 years. His contributions earned him the nickname “National Treasure.”
As Seo hangs up his sneakers, people are debating who can take his place as the next premier big man. Youthful centers Ha Seung-jin and Oh Se-geun are among the candidates, but they have yet to demonstrate the on-court presence of Seo.
Goliath has left big shoes to fill. (minsikyoon@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