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뜻 보면 털실을 꼬아서 만든 것처럼 보인다.
미국 시민권자이면서 한국 국적자인 박태부(미국이름 로버트 박·72) 작가의 설명이 없으면 그렇다는 얘기다.
그러나 박 작가로부터 붉은색 얼굴을 한 '반고신화'(盤古神話)라는 제목의 조소 작품을 구더기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기자의 입에서는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것도 세상 어디에도 없는 작품이며, 10년에 걸쳐 완성했다고 한다. 그런데 공식 가격이 무려 18억 원이라는 말에 두 번 놀랐다.
구더기로 어떻게 작품을 만든단 말인가. 1일 오후 궁금증을 풀려고 박 작가를 만났다.
그는 "이 작품을 2일부터 5일간 광주광역시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리는 광주 아트페어에 전시한다"고 밝혔다.
'왜 하필 낚시 미끼 정도로나 쓰이는 더러운 구더기를 소재로 삼았나'라는 질문부터 했다.
"아무도 만들지 않는 작품을 만들어야 희귀성이 있잖아요. 뭘 만들까 조사하던 중 중국의 창세기(創世記) 격인 반고의 신화를 읽었어요. '알 속에서 무려 1만 8천 년을 살던 반고는 천지를 창조하고 죽을 때 그의 몸에서 생겨난 구더기가 바람을 만나 인간이 되었다'라는 내용을 본 순간 무릎을 탁 쳤죠. 1주일에 두 번씩 서울 인사동, 청담동 등 우리나라 화랑가를 돌아다니며 조사했어요. 누가 구더기를 소재로 작품을 만들었으면 안 되잖아요. 9년간을 조사한 끝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작업을 시작했죠.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초대 국가주석 마오쩌둥(1893∼1976년)의 두상을 구더기로 만들기로 한 것입니다. 신화를 읽는 순간 '반고=마오쩌둥'이 떠올랐죠."
그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마오쩌둥의 얼굴을 구더기로 빚으면 과연 이들이 좋아해 줄까를 더 고민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꿈틀거리는 구더기로 어떻게 작품을 만들었을까?
우선 구더기를 붙일 바탕을 만들어야 했다. 스티로폼으로 두상의 본을 뜬 뒤 물에 담갔던 화장지를 하나하나 실처럼 찢어 그 위에 붙여 얼굴 모양을 형성했다. 말리고 다시 붙이고, 또 말리고, 그런 다음 마무리로 검정 수성페인트를 칠하기까지 2개월이 걸렸다.
"중국인들이 '여덟 팔'(八)자를 좋아하잖아요. 그래서 얼굴에 '팔'자를 888개, 1천888개, 2천888개를 넣겠다고 생각했죠. 그러려면 구더기 수는 곱하기 2를 해야 하니까 1천776마리, 3천776마리, 5천776마리가 필요했어요. 그 많은 구더기를 어디서 구해야 하나. 앞이 캄캄했죠. 그러다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인이 구더기를 배양해 낚시가게에 유통한다는 소식을 들었죠. 수소문 끝에 그를 찾아 재료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작품 하나 만들려면 6만 마리가 필요했는데, 구더기 값으로만 100만 원이 넘게 들었어요."
작품 제작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구더기를 산 채로 붙일 수는 없기에 굽기도 하고, 볶기도 하고, 삶기도 하고 수없이 많은 방법을 동원했다. 가까스로 붙여놓으면 시간이 지나 썩어 냄새가 나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했다. 구더기 처음 모습 그대로 붙여야 하는데 불이 세면 다 터져버리고, 부서지기도 하고 도무지 해결책이 보이질 않았다.
"하루는 잠을 자는데 꿈에 어떤 분이 나타나 '너 정말 고생한다. 지금부터 얘기하는 걸 들어라. 구더기를 프라이팬에 볶아라. 그런데 볶을 때 톱밥을 넣고 불 조절을 잘하고 저으면서 볶아라'라고 말하는 거였어요. 얼른 일어나 똑같이 해봤죠. 그랬더니 구더기의 질감은 살아 있으면서 냄새도 없고, 딱 맞았어요."
박 작가는 풀로 '여덟 팔'자를 만들어 붙여 나가다 숫자가 틀리면 다시 헤아리고, 떼었다 붙이기를 수없이 하면서 그렇게 두상을 만들었다. 계수기를 사서 숫자를 헤아릴 정도였다. 그렇게 작업해 작품 3점을 만들었다.
현재 세계 아티스트들의 등용문인 프랑스의 에마뉘엘 페로탱에 2점, 한국 갤러리 미셸에 1점이 소장돼 있다. 페로탱의 소속 작가가 되면 작품당 100억 원이 넘는 가격을 받을 수 있을 정도다. 원래 그는 작품 1점당 50억 원을 책정했지만, 갤러리 미셸에서 우선 20억 원부터 시작하자고 의견을 내 그 액수로 내렸다고 한다. 이 갤러리 소장품이 광주 아트페어에 선보이는 것이다.
"중국인들이 '팔'자를 좋아하니 18억으로 다시 내렸어요. 그런데 중국의 재벌들이 작품 사진만 보고는 50억 원짜리 작품을 만들어달라고 주문을 해왔어요. 그들이 구더기 작품을 그렇게 좋아할지는 몰랐어요. 그래서 '여덟 팔'자가 8천888개 들어간 마오쩌둥의 두상을 만들 계획이에요. 또 각각 다른 작품 56개를 제작할 겁니다. 중국의 56개 소수민족을 상징하는 것이죠."
이번 광주 전시가 끝나면 이 작품(2천888개짜리)은 24일부터 4일간 중국의 '베이징 인터내셔널 아트 차이나'에서 중국인들에게 선보이고 난 뒤 시진핑 국가주석에게 선물할 계획이다. 기증은 '땡큐21 문화교류재단'(이사장 김성걸)이 대행한다.
부산 출신인 그는 홍익대 서양화과에 입학해 3년을 다니다 광고미술 전공으로 전과했다. 졸업 후 동아제약에 근무하다 광고대행사 선진으로 옮겨 제작국장을 맡다가 1976년 1월 미국 LA에 이민했다.
그곳에서 TV CF 감독으로 일하며 롤스로이스, 도요타 등 유명 자동차 회사 16곳의 광고를 도맡아 제작했다. 미국과 한국 광고업계에서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1989년 LA에서 하와이로 이주해 2002년까지 살다가 한국에 돌아왔다. 하지만 지금도 양국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한다.
그는 사진작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요세미티 국립공원, 그랜드캐니언 등의 풍경을 찍으려고 100회가 넘게 출사했다. 그러나 그가 유명해진 것은 카메라를 흔들면서 찍는 '셰이크 핸드' 기법을 동원하면서부터다. 이 또한 지구상에서는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란다.
'사진의 연금술사'라는 별명이 붙은 그는 2012년 진주의 소싸움 장면을 찍어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에게 증정하기도 했다. (연합)